안녕2015. 8. 18. 02:52

4월에 열정대학을 하면서 거기서 나에게 중요한 가치 다섯 가지에 대해 썼었어. 그 때의 나의 생각.


1.다양성 - 다양성이 나를 존재하게 만들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 모든 존재의 다름, 그리고 그 다름을 가능하게 만드는 같음이 있기에 나는 나의 삶의 의미를 찾았고 내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삶 자체에 대한 끝없는 회의와 공허함에 빠졌을 때 나를 끌어올려준 것이 다양성의 아름다움이었다. 나는 나의 다름을 가지고 있기에 내 자신을 사랑하게 되고,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다양성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어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곳 또한 사랑할 수 있다. 다른 매력을 가진 사람들, 다른 생각들, 계절의 변화, 내가 가보지 못한 곳들, ... 이것들이 없다면 나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할 것 같다. 전에는 다름과 변화만이 나에게 즐거움을 준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같음, 불변, 보편성이라는 것이 있기에 다름과 변화 또한 의미가 있고 아름다울 수 있음을 깨닫고 난 후 다름만이 전부가 아님을 깨달았다. 다양성이라는 것은 단순히 다름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다름과 같음을 모두 복합적으로 가지고 있는 가치이다.
2.사람 - 사람이 꼭 가족, 친구, 지인, 멘토와 같은 특정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절대 혼자 살아갈 수 없다. 생각을 나눌 수 있고 서로의 존재를, 가치를, 소중함을 알아줄 수 있는 사람이 내게는 필요하다. 내 스스로가 내 자신의 존재를 인지하기도 하지만 다른 이들로부터 내 존재를 인지하고 나를 더욱 알아가게 되고 더 나아가 다른 이들을 알아가게 되면서 서로가 서로의 힘이 되고 촉매제가 된다. 
3.결핍 - 완벽하지 않음이 내게는 정말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면 이 세상은 변화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오류가 절대 나지 않는 기계와 같이 모두 딱딱 떨어져 돌아간다면 무슨 재미가 있을까. 옳은 것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옳은 것이 무엇일까 고민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그것을 두고 싸울 일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 또한 이미 완벽하다면 더 좋은 길로 가기 위해 고민하고 도전하고 갈등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결핍은 변화의 씨앗이 되고, 다른 이들과 갈등의 씨앗이 되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풀어가기 위해 소통하고 치고받고 싸우기도 한다.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완벽하지 않은 다름들이 존재하게 되고 역동적인 삶과 사회가 만들어진다. 나는 다른 이들에게서 결핍을 발견할 때 그 사람을 더 이해하게 되고 그 사람이 내게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다양성과 마찬가지로 결핍은 내가 나와 다른 존재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는 근본 가치이다. 
4.감각 - 감각은 인간의 존질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감각을 통해서 나는 살아있음을 느끼고 감각을 통해서 세계를 바라보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서 감각을 통해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나는 나의 감각을 만끽하는 삶을 살고 싶다. 그래서 평소에도 지하철보다는 버스나 도보를 선호한다. 버스를 타거나 걸어다니면 바깥의 더 많은 풍경들을 볼 수 있어 나의 감각들을 자극한다. 비록 점점 겨울과 여름이 길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나라는 비교적 뚜렷한 사계절을 가지고 있어 계절마다 다른 풍경을 볼 수 있고, 다른 소리, 다른 향기, 다른 맛, 다른 느낌과 분위기들을 느낄 수 있어서 정말 좋다. 그리고 때로는 다른 감각들을 더 풍부하게 느끼고 싶어 눈을 감고 걷거나 눈을 감고 잠시 어딘가에 머물기도 한다. 그만큼 나는 나의 감각을 만끽하며 살아가고 싶다. 
5.자유 - 위의 네 가지는 내가 평소에 살아가면서 자주 생각을 해왔던 부분인데 그 외에 무엇을 하나 더 쓰면 좋을지 모르겠어서 다섯 번째 가치관을 무엇으로 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나는 자유를 매우 중시해왔다. 자기 자신이 온전히 자신일 수 있는 자유. 다양성이라는 것도 사실은 자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모두가 자신의 자유를 가지고 있어야만 다양성이 나타날 수 있다. 그리고 '나중에 내가 자식을 낳는다면'을 생각할 때에도 나는 나의 자식에게 자유의지를 주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유에 반대하는 것도 자유이다. 하지만 자유를 억압하고 봉쇄하는 것은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돌이켜보니 '저렇게 하는 것은 폭력이야.'라는 식의 말을 많이 했던 거 같다.


'안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에 책을 읽으며 남겼던 짜투리 글  (0) 2015.08.18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안녕2015. 8. 18. 02:48

나만 글을 안 올렸었지 ㅎㅎ

알바 시작한 이후로 뭔가 정신이 없어진 거 같당 최근엔 글은 커녕 책도 거의 못 본듯..ㅎ

예전에 남겼던 짜투리 글 두어 개 일단 가져왔어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마도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가는 장면과 같은 소설을 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삶도 그러한 것 같다.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나갔다 다시 밀려오고... 우리는 미래를 그리면서, 목표를 세우고 그것만 이룬다면 세상을 다 가진 것과 같을 것처럼 목표를 신성시하지만, 그 목표를 달성한다고 하더라도 파도가 밀려온 후 다시 밀려나가듯이 그 목표를 이룸에서 끝나지 않고 다시 새로운 목표의 설정을 필요로 한다. 고민이라는 것 또한 밀려나간다고 해도 또다시 밀려오게 된다. 인생의 한 지점만을 보고 그것을 향해 일직선의 도로를 달려나가는 것이 인생이 아니라,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나가고 다시 밀려오고 밀려나가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본다는 행위에도 육감이 동원되어야 한다. 만져보고 느껴보고 들어보고 맡아보고 쳐다보고 난 후 종합적인 감동이어야 한다.

그래서 난 사진에 제목 붙이는 것을 거부한다. ... 설명할 수 있으면 글로 표현했을 것이다. 설명할 수 없기에 사진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김영갑 갤러리에서 그의 이야기를 보았을 때 나도 모르게 울컥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정확히 무엇 때문에 그랬던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삶에는, 그의 생각에는 힘이 있다.

대체 무엇이 제주를 그렇게 매력적으로 만드는 건가 싶었다. 무엇에 이끌려 김영갑 작가는 제주 속에서 이십 년을 보냈고 그 속에서 그는 무엇을 찍고 무엇을 보여주고 싶어했던 걸까. 그가 말하는 외관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그 이면에 있는 제주의 아름다움이 뭘까.

그것에 빠져 미친듯이 몰두했던 그의 삶에 처음에는 이질감과 경외감을 느꼈다. '나는 저렇게 살지 못할텐데.' 처음에는 그런 그가 대단하고 달라보였고 그의 그런 열정과 몰두가 그 공간 너머로 나에게 전해져와 감정이 복받쳐올랐던 것 같다.

그런데 그의 글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생각들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행보가 그냥 자연스럽게 그려진 것은 아니구나를 절감했다. 그도 외로움을 느끼고 내가 가지는 감정들을 똑같이 느끼고 그것에 똑같이 괴로워하는 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산 것은 그에게는 뚜렷한 그의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외로움을 벗어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었고 외로움이나 배고픔은 그가 관철하고자 하는 바에 자연스레 수반되는 과정임을 그는 알았던 것이다. 외로움은 견디기 힘든 일이지만 그 외로움을 통해서만 이루어낼 수 있는 일이 있다.

사진에 대해 말하는 그의 모습에는 확신이 있다. 그런 확신이 있었기에 배고픔과 외로움과 수난 속에서도 그는 이십 년을 섬에서 지낼 수 있었을 것이고, 이러한 사진관과 가치관이 형성되기까지 그 과정 또한 그냥 이루어진 것은 아닐 터이다. 취미로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은 하지만 솔직히 말해 나는 그저 예쁜 사진을 찍는 것이 좋고 그 이상의 것을 사진에 담으려고 했던 적도 없다. 사진은 내게 그 이상의 그 이하의 존재가 아니었는데 김영갑 작가의 글을 읽으며 사진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런다고 해서 내가 앞으로 외형상의 아름다움 이상의 사진관을 가질 것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사진이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마음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빈 마음으로 갔던 그의 갤러리에서 그의 사진, 그의 삶, 그리고 그의 말을 통해 많은 것을 채워간다.


'안녕'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치 다섯 가지  (0) 2015.08.18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네온하늘2015. 8. 2. 00:26

현재로 오는 과거와 이미 현재인 과거가 있다. 기억은 회상을 통해 지금의 의식으로 침투한다. 나는 내가 보고 있는 것, 듣고 있는 것, 느끼고 있는 것에서 점점 멀어져 주위와 단절된 방에 들어간 것처럼 과거의 장면들을 본다. 시간은 흘러간다. 하지만 그 흘러가고 있는 시간의 장면들은 과거의 기억들로 대체된다. 이미 현재인 과거란, 현재에 색을 칠하는 기억들이다. 내가 그것들을 떠올리려 노력하지 않아도 그것들은 거의 자동적으로 내가 지금 보고 듣고 있는 장면들에 과거의 조각들을 덧씌운다. 그렇게 현재에 침투하는 과거들이 있기에 현재는 온전히 현재일 수 없다. 현재의 장면은 불성실한 화가가 중간에 그만둔 작업물과 같이 군데군데 불규칙하게 색깔이 칠해져 있는 캔버스가 된다. 나는 달을 바라본다. 그러나 그 달은 내가 과거에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 특별하게 보았던 달이기에 지금도 내게 의미 있게 다가온다. 만약 내가 저 달에 대한 특별한 기억을 갖고 있지 않다면, 지금의 달은 어제의 달과, 또 내일의 달과 내겐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과거가 현재에 침투한다. 그것은 과거가 칠해놓은 장면의 부분들이 아닌, 현재인 채로 남겨진 대부분의 장면이 나를 통과해 지나간다는 것을 뜻한다. 도서관의 서가를 아무리 헤매어도 나는 내가 어디에 떨어져 있는지 알 수 없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내가 과거에 보았던 것, 알고 있던 것, 또 그것과 관련되어 내가 알게 된 것들이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점으로 된 지도일 뿐이다. 하지만 언제나 과거가 현재를 압도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우연한 마주침을 경험한다. 지난 날 아무리 많이 스쳐 지나갔어도 그곳에 있는 줄도 몰랐던 어떤 것이 어느 날은 불현듯 내 시야에 들어온다. 그것은 아마 내가 현재에 대해 얼마나 열려있는가, 혹은 닫혀있는가의 차이일 것이다. 내가 현재에 대해 닫혀있다면 나는 온전히 현재를 산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현재를 살고 싶은데도 나의 존재가 내 의지와는 반대 방향으로 가는 수가 있다. 자꾸 내 현재에 침투하려고 하는 것은 좋은 기억일까, 나쁜 기억일까? 경험적으로 그것들은 내 현재의 기쁨을 망치려고 언제나 때를 노리며 준비하고 있는 것 같은 나쁜 기억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불쾌한 기억들이 아니다. 잊히지 않은 기억, 잊힐 수 없던 기억들이다. 그것들은 그것이 생겨난 과거의 모습 그대로 끊임없이 현재에 개입한다. 예컨대 특정 알레르기를 앓거나 기타 불가피한 신체적 증상을 겪는 탓이 아니면서 어떤 음식을 먹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 생각해보라. 그가 그 음식을 피할 때마다 이야기하는 것은 매번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릴 적 그의 머릿속에 박혀 들어간 기억의 조각이 때를 만나면 놓치지 않고 현재에 개입하여 그의 행동을 막는다. 우리는 세상에 미련을 갖고 죽은 사람이 죽어서도 세상을 떠돈다고 말한다. 아마 기억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간 시간 속에 빛 바랜 채로 남아 있어야 할 기억들이 무엇 때문에 자꾸만 현현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과거 역시 그렇다. 해결되지 못한 기억들. 하지만 시간을 껍질처럼 뒤집어쓴 못된 기억이 본래 어떤 모습이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괴로운 현재에 비추어 끊임없이 그 기억들을 추적한다. 달리 말해, 해석한다. 무엇이 잘못되었고, 그것이 어떻게 되어야 할지를. 괜찮다, 잘못된 것이 아니다, 함께 가자, 하는 말을 들어야 했지만 영원한 고독 속에 남겨진 그 순간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것들을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기 위해서. 그러나 과거는 밝혀지지 않고 해석된다. 나에게 자신의 과거는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발견의 대상이다. 내 안으로 눈을 돌릴수록, 눈을 돌리게 될수록 나는 현재에 눈 감는다. 하지만 만약 내가 과거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면, 조금 더 천천히, 조금씩 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과거가 계속 재발견되는 것이라면, 힘들 때에는 그것을 재발견하고 다시 재발견할 미래의 나를 기다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다면 현재와 과거, 모두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살 수 있지 않을까?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